강스포 ,장문) 영화 오디세이의 현대식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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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영중인 영화 오디세이는 원전을 충실히 재현하기보다
신화 속 기괴한 폭력과 초자연적 시련을 전쟁을 겪은 인간의 죄책감과 자기기만에 관한 이야기로 다시 구성된 작품임.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모험은 제외하고, 영화에서 나타난 오디세우스의 귀향길을 따라 원전과의 차이를 살펴보고자 함.
지루하면 맨 아래 결론만 보아도 무방하다.

서막. 트로이의 목마
원전 <오디세이아>에서 트로이 목마는 이미 끝난 전쟁의 기억으로 언급될 뿐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직접적으로 시작시키는 장면이 아님.
반면 영화는 트로이의 목마 작전을 길게 보여주며 이후 벌어지는 모든 재앙의 기원으로 삼음.
특히 시논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가 아니라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인데
영화에서는 오디세우스의 계략에 이용당한 희생자로 재해석해 부각시킴.
오디세우스는 목마를 아테네에게 바치는 제물로 위장하여 트로이인들의 환대를 무기로 이용했고, 시논에게도 작전의 진실을 알리지 않음.
원전에서 목마가 오디세우스의 지략을 증명하는 영웅적 업적이었다면
영화에서는 타인의 신뢰와 생명을 수단으로 삼은 '최초의 죄'로 묘사됨.
이러한 연출로, 이후의 귀향은 단순히 신들의 저주 때문에 길어진 항해가 아니라, 그 때 만들어진 죄의 대가를 치르는 과정으로 읽히게 됨.
귀향길의 첫 상륙.
귀향길에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이 약탈하는 마을은
원전의 키코네스족이 사는 이스마로스에 해당함.
원전에서 오디세우스는 트로이를 떠난 직후 이스마로스를 공격해 남자들을 죽이고 여자와 재물을 약탈함.
이후 철수하자는 오디세우스의 명령을 부하들이 무시하고 술과 가축을 탐하다 지원군을 데려온 키코네스족의 반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음.
원전에서 오디세우스는 이 약탈을 특별한 도덕적 문제로 여기지 않고 전쟁 이후의 당연한 전리품 획득처럼 이야기함.
영화에서는 오디세우스가 촌장에게 왜 자신들을 피해 도망쳤냐고 묻고
촌장은 이들이 마을을 파괴하고 약탈하는 '바다 민족'인줄 알았다고 대답함.
오디세우스는 자신들을 바다 민족이 아니라 그리스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순간 그의 부하들은 실제로 마을을 붙래우고 약탈하고 있음.
이름만 그리스인일 뿐, 마을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소문으로 듣던 바다의 약탈자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거임.
여기서 "왜 도망갔느냐"는 질문은 오디세우스의 자기기만을 드러냄.
그는 자신들이 트로이에서 승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정규군이며, 낯선 마을에서는 제우스의 율법에 따라 환대와 식량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함.
그러나 마을사람들에게는 무장한 군인들이 배를 타고 나타났다는 사실만이 보임.
트로이에서 거짓 선물을 이용해 도시를 무너뜨렸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면, 이들을 손님으로 맞이하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가 됨.
따라서 이 장면은 제우스의 율법이 효력을 잃었다는 사실보다는
그 율법을 가능하게하던 상호 신뢰가 사라졌다는 의미에 가까움.
당시 손님을 환대하던 '크세니아'는 주인이 낯선이를 먹이고 보호하는 의무 뿐만 아니라,
손님 역시 주인의 집과 재산을 존중해야 성립하는 쌍방의 규범이었음.
그런데 트로이 목마는 '선물'을 '무기'로 바꾸어 버렸고,
영화가 제시하는 논리에서는 오디세우스의 계락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존 규칙을 무시해도 된다는 신호가 된 셈임.
이 과정은 일종의 자기실현적 붕괴임.
1. 마을 사람들은 약탈을 두려워해 도망갔고
2. 오디세우스는 환대를 받지 못해 마을을 약탈함.
3. 실제 약탈이 벌어지며 마을사람들의 두려움이 옳았음이 증명됨.
4.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음번에 나타나는 이방인을 더욱 불신하게 되고
5. 그 이방인 역시 적대적인 대우를 구실로 먼저 폭력을 사용하게 됨.
이렇듯 불신과 선제폭력이 반복되며 사회 전체의 기능을 잃게되는 구조가 드러남.
1. 폴리메모스의 동굴
키클롭스 폴리페모스의 동굴에서도 위와 같은 재해석이 분명하게 드러남.
원전의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아무도 아닌 자'라고속이고 포도주로 폴리메모스를 취하여 잠들게 만든 뒤
불에 달군 말뚝으로 눈을 찔렀음.
양의 배 밑에 매달려 동굴을 빠져나온 뒤에는 안전한 거리까지 도망쳤음에도 자신의 승리를 자랑하고 싶어 본명을 외침.
이 때문에 폴리페모스가 아버지 포세이돈에게 오디세우스를 저주해달라고 기도하게 됨.
원전에서 묘사된 문제는 명예욕과 오만, 즉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하는 영웅의 욕망임.
영화에서 오디세우스 일행은 폴리페모스의 동굴에 주인 허락없이 들어가 치즈와 음식을 건드린 뒤,
주인이 돌아오자 자신들은 손님이므로 환대해야 한다고 생각함.
폴리페모스가 사람을 잡아먹는 것은 명백한 야만이지만
영화는 그에 앞서 오디세우스 일행 역시 모범적인 손님이 아님을 보여주었음.
이는 앞서 이스마로스에서 그랬듯, 제우스의 율법이 더이상 기능하지 않는 세계라는 것을 의미함.
원전에서 '아무도 아닌 자'라는 속임수와 키클롭스를 혼란시키는 희극적 요소는 사라지고
동굴은 단순한, 이해할 수 없는 신화적 존재에 의한 공포스러운 학살의 공간이 됨.
따라서 탈출하기 위한 방법도, 압도적인 폭력에 항거하기위한 마찬가지의 폭력으로써, 단순히 괴물의 눈을 찔러 실명시키는 것으로 표현됨.
탈출한 뒤 폴리페모스가 죽은 병사의 투구를 뱉자 오디세우스는 굳이 화살을 쏘아 그를 도발함.
원전의 말로 된 자기과시가 영화에서는 한발의 화살로 대체된 셈임.
그 화살은 탈출을 위해 필요하지도 않았고 동료를 구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음.
오직 모욕당한 감정과 복수심을 풀기위한 행동이었으며, 결과 추격이 시작되고 더 많은 부하가 죽게됨.
영화 속 오디세우스의 결함은 단순한 허영심보다 전쟁에서 굳어진 분노와 폭력성에 가까움.
2. 라이스트뤼고네스의 섬(거인족)
원전에서 라이스트뤼곤은 텔레퓔로스라는 도시를 이루고 살아가는 식인거인족임.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왕궁을 방문했다가 습격당하고, 거인들은 항구를 둘러싼 절벽 위에서 바위를 던져 배를 부수며
부하들을 물고기처럼 꿰어감.
이 장면의 공포는 나름의 도시와 왕, 사회를 갖추고 있던 이들이 야만적인 괴물이라는 것임.
문명과 환대를 기대하고 들어간 장소가 조직적인 식인의 공간이었던 것.
영화에서는 도시와 왕궁, 정찰과정 같은 요소를 줄이고 추격과 학살에 집중함.
평범한 인간처럼 보였던 이가 사실은 어린 아이였고, 거대한 전사들을 불러들여
중무장한 라이스트뤼고네스들이 오디세우스 일행을 학살함.
이들은 단순히 괴물이라기보다 새로운 시대의 군대처럼 보임.
트로이를 무너뜨린 승리자들이 자신들보다 훨씬 강한 폭력 앞에 사냥감으로 전락한 것.
원전이 낯선 공동체의 기괴함과 환대의 반전을 보여준다면 영화는 전쟁의 승자가 영원히 강자로 남을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줌.
오디세우스는 이 사건으로 남은 배들을 잃고 사실상 한 척에 의지하게 됨.
3. 키르케의 섬
원전의 키르케는 음식과 약물, 지팡이를 사용해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돼지로 바꿈.
부하들의 정신은 인간인 채로 남아 있으며, 오디세우스는 헤르메스가 준 약초의 도움으로 키르케의 마법을 이겨냄.
이후 키르케에게 칼을 겨누고 맹세를 받아낸 뒤 부하들을 되돌림.
두 사람은 적대 관계에서 연인과 조력자의 관계로 바뀌고, 오디세우스 일행은 섬에서 오랫동안 머물게 됨.
영화의 키르케는 훨씬 거칠고 방어적인 인물임.
그녀는 자신의 거처에 들어온 군인들을 잠재적인 약탈자이자 가해자로 바라봄.
굶주린 부하들이 음식을 탐하는 순간 키르케는 그들의 얼굴과 몸을 돼지로 변형시킴.
이 변신은 우아한 마법이 아니라 키르케가 직접 인간의 육체를 주물러 짐승의 형태로 빚어내는 공포로 연출됨.
오디세우스가 사냥한 짐승까지 죽는 순간 인간으로 돌아오는 장면은 섬의 동물들이 모두 과거에 변신당한 사람들이었음을 암시함.
원전에서 돼지의 모습은 인간의 정신을 가둔 외부의 저주에 가까움.
영화에서는 반대로 돼지야말로 군인들의 탐욕과 폭력성을 드러낸 진짜 얼굴처럼 취급됨.
키르케는 자신이 인간을 짐승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짐승인 남자들의 위장을 벗긴다고 생각함.
이러한 심리는 부하들을 인간으로 되돌릴 때, '다시 (인간으로) 위장하여라'는 대사에서 드러남.
다만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이 실제로 그녀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벌을 내린다는 점에서
키르케 역시 공포에 사로잡혀 폭력을 선제적으로 사용하는 인물임.
이에 대한 해결책 역시, 오디세우스가 까마귀로 변한 키르케의 언니를 틀어쥐고 협박하는 것이었음.
영화는 이 장면을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히 구분되는 대결로 만들지 않음.
결국 이 또한, 서로가 상대의 폭력을 예상하며 먼저 위협하는 세계, 즉 전쟁 이후 신뢰가 완전히 붕괴한 세계를 보여줌.
4. 죽은 자들의 세계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여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격적으로 마주하게 됨.
원전의 테이레시아스는 앞으로 닥칠 시련과 귀향의 조건을 예언하는 인물임.
영화에서도 예언자로 등장하지만, 그의 말은 운명을 알려주는 신탁이라기보다 오디세우스에게 책임을 돌려주는 판결에 가까움.
신들이 부하들을 죽이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그들을 파멸시키는 것은 그들 자신의 선택과 욕망이라는 것임.
영화가 이 공간에 시논을 다시 등장시킨 것도 같은 이유임.
시논은 오디세우스에게 자신이 영웅적인 작전을 위해 희생된 것이 아니라, 진실도 모른 채 이용당하고 버려졌다고 항의함.
오디세우스가 트로이에서 했던 선택은 이미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계속해서 현재의 죽음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됨.
아가멤논 역시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귀환한 장소에서 아내에게 살해당한 영웅의 모습으로 오디세우스 앞에 나타남.
따라서 죽은 자들의 세계는 다음 모험을 안내하는 장소인 동시에, 오디세우스가 외면해 온 희생자들이 그에게 책임을 묻는 재판정이 됨.
5. 세이렌 암초
세이렌 장면에서 원전과 영화의 차이는 유혹의 내용에서 드러남.
원전에서 오디세우스는 키르케의 조언에 따라 부하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고 자신은 돛대에 묶임.
세이렌의 노래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직접 들어보려 한 이유는 단순한 호기심만이 아님.
세이렌은 트로이에서 벌어진 일과 세상의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하며, 오디세우스를 위대한 영웅으로 불러 세움.
오디세우스는 죽음을 감수하면서까지 지식과 자기 명성의 확인을 원했던 것임.
영화의 세이렌은 보편적인 지식을 약속하기보다 오디세우스 개인의 결핍을 파고듦.
그 노래는 그가 원했던 것, 잃어버린 것, 지키지 못한 약속을 들려주고,
결국 오디세우스 자신도 실제로는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폭로함.
여기서 세이렌은 외부의 괴물이면서 동시에 오디세우스의 내면에 존재하는 목소리임.
귀향을 간절히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죄책감과 책임을 마주하기 두려워 계속 바다에 머물고 싶은 마음을 들춰내는 것임.
원전의 세이렌이 지식과 명예에 대한 영웅의 욕망을 시험한다면, 영화의 세이렌은 귀향이라는 목표 자체가 자기기만일 수 있음을 의심하게 만듦.
6.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원전의 오디세우스는 배 전체를 삼킬 수 있는 카리브디스보다 여섯 명을 잡아먹는 스킬라 쪽을 선택함.
그는 부하들에게 진실을 알리면 공포에 빠져 항해를 포기할 것이라 생각해 위험을 숨김.
결국 여섯 명이 끌려가 죽지만 나머지는 살아남음.
영웅의 판단이기는 하나, 그 판단의 대가를 치르는 사람은 오디세우스가 아니라 이름 없는 부하들임.
영화는 이러한 구조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냄.
오디세우스는 모두를 살릴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부하들에게 충분한 진실을 말하지 않고,
일부러 불가능해 보이는 카리브디스로 향할 것을 명령함.
부하들이 이에 항거하여 스킬라 쪽으로 배를 틀고, 결국 여섯 명의 부하들이 희생당함.
이에 이미 알고있지 않았느냐 항의하는 부관을 보며
"너희가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가 불가능한 카르브디스로 향하자고 하자, 너희들이 내가 예측한대로 행동(명령을 어기고 스킬라로 향함)해
이렇듯 살아남지 않았느냐"고 답함.
그가 트로이에서 시논을 이용한 방식이 다시 반복되는 셈임.
전체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소수를 속이고 희생시키며, 그 결정을 지략과 불가피성이라는 말로 정당화함.
7. 태양신의 소떼
성스러운 소를 잡아먹는 장면에서는 인간의 선택과 신의 처벌이 정면으로 만남.
원전에서 소 떼의 주인은 태양신 헬리오스이며, 오디세우스 일행은 절대 손대지 말라는 경고를 받음.
그러나 폭풍 때문에 섬에 갇히고 식량이 떨어지자 부하들은 굶어 죽느니 신의 소를 먹고 대가를 치르겠다고 결정함.
제우스의 벼락이 배를 파괴하고 오디세우스만 살아남게 됨.
영화는 소 떼를 보다 인지도가 높은 아폴론의 것으로 바꾸었지만 핵심 구조는 유지함.
중요한 것은 부하들이 단순히 탐욕 때문에 금기를 어긴 것이 아니라는 점임.
이들은 오랜 항해와 굶주림, 반복되는 희생으로 절망한 상태임.
그럼에도 선택은 선택이며, 영화는 이들의 파멸을 변덕스러운 신의 장난으로만 돌리지 않음.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처럼 오디세우스는 신들로부터 부하들을 지킬 수 있을지 몰라도, 부하들 자신으로부터는 지킬 수 없음.
동시에 부하들을 그 절망까지 몰아넣은 지휘관에게도 책임이 남아 있음.
8. 칼립소의 섬
칼립소의 섬은 영화가 오디세우스의 귀향 의지를 가장 크게 의심하는 대목임.
원전에서 칼립소는 오디세우스를 7년 동안 붙잡아 두고 불멸까지 제안함.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와 고향을 그리워하지만 스스로 섬을 떠날 힘은 없으며, 결국 신들의 명령으로 칼립소가 그를 보내줌.
원전의 갈등이 필멸의 인간으로 집에 돌아갈 것인가, 불멸의 삶을 택할 것인가에 가깝다면 영화는 이를 기억과 망각의 문제로 바꿈.
영화의 칼립소는 오디세우스에게 연꽃을 먹여 기억을 흐리게 함.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잃었는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점차 잊음.
그러나 이 망각은 칼립소가 일방적으로 가한 감금인 동시에 오디세우스가 받아들이고 싶어 한 도피이기도 함.
트로이와 죽은 부하들, 페넬로페와 텔레마코스에게 돌아가 설명해야 할 책임을 모두 잊을 수 있기 때문임.
오디세우스가 기억을 회복하고 섬을 떠나는 선택은 단순한 탈출이 아니라, 고통스럽더라도 자신의 과거와 다시 연결되겠다는 결단이 됨.
9. 이타카로 귀환
이타카로 돌아온 뒤에도 영화는 원전의 귀환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음.
영화의 오디세우스는 먼저 필로스에서 위험에 처한 텔레마코스를 구하고, 두 사람은 서로를 완전히 알아보지 못한 상태에서 관계를 맺기 시작함.
원전에서 부자 상봉이 신의 도움을 받아 정체를 확인하고 복수를 계획하는 장면이라면,
영화에서는 오디세우스가 ‘아버지’라는 이름을 되찾는 과정에 가까움.
그는 집에 도착했다고 해서 곧바로 남편이나 아버지, 왕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음.
그 자리를 비운 시간과 자신이 저지른 선택을 먼저 감당해야 함.
활쏘기 시합과 구혼자 학살은 원전의 구조를 비교적 충실하게 따름.
페넬로페가 오디세우스의 활을 내걸고, 누구도 당기지 못한 활을 정체를 숨긴 오디세우스가 손쉽게 다루며, 그 순간부터 복수가 시작됨.
그러나 영화는 이 승리를 영웅의 질서 회복으로만 그리지 않음.
오디세우스는 여전히 전쟁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이타카의 궁전은 다시 한번 학살의 공간이 됨.
트로이에서 시작된 폭력이 고향의 한가운데까지 따라온 것임.
9. 결말
결말에서 원전과 영화의 방향이 결정적으로 갈라짐.
원전의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정체와 권리를 인정받고 이타카의 왕으로 복귀하였으나,
영화에서는 텔레마코스에게 통치를 맡기고,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가 서쪽으로 떠나는 결말을 택함.
따라서 영화 속 귀향은 잃어버린 자리를 되찾아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자신이 불러온 폭력으로부터 이타카를 분리하며, 살아남은 자로서 희생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떠나는 일이 됨.
결론
영화 오디세이를 두고 그렇게까지 재미있지 않았다. 지루했다. 하는 평이 나오는 것도 이해할만함.
원래 원전 <오디세이아>의 모험들은 현대적 의미의 치밀한 인과관계로 연결되기보다 낯선 섬에 도착하고 기괴한 존재를 만나며
반복되는 강압과 폭력을 겪는 일화들의 연속에 가까움.
영화 역시 그 기본 구조를 유지하고 있어 관객에 따라서는 하나의 서사가 진행된다기보다
거대한 신화적 편린을 차례로 보여주는 듯한 인상을 받을 수 있음.
다만 영화에서는 그 느슨한 신화적 구조에 일관된 주제를 부여함.
원전에서 감히 대항할 수 없는 신들의 분노와 운명으로 설명되던 사건들을
인간의 선택과 책임으로 끌어내리고, 괴물들을 단순한 외부의 적이 아닌 오디세우스와 병사들 안에 남은 전쟁의 폭력성을 비추는 거울로 표현함.
키클롭스에게 쏜 화살, 키르케의 돼지들, 시논의 원망, 세이렌의 노래, 스킬라에게 내어준 부하들, 성스러운 소를 잡은 병사들은 모두 같은 질문으로 이어짐.
이들을 파멸시킨 것이 정말 신들이었는지, 아니면 인간의 욕망과 분노, 비겁함에 있는지 묻는 것임.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가 온갖 유혹과 죽음을 이겨내고 자신의 이름과 왕국을 되찾는 영웅의 이야기라면
놀란의 오디세이는 그 이름과 왕좌를 되찾은 뒤에도 자신이 저지른 일을 짊어져야하는 인간의 이야기임.
영화에서 진정한 귀향은 오디세우스가 트로이에서 시작된 폭력의 책임을 인정하고 죽은자들을 향한 새로운 항해를 시작할때 비로소 완성됨.
오디세이 3줄요약
신화의 탈을 쓴 인간서사
괴물보다 무서운 건 결국 인간의 선택
귀향했지만, 예전으로는 돌아가지 못하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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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트님의 댓글
게이트 작성일니가 직접씀?

LaNoir님의 댓글
LaNoir 작성일ㅇㅇ 직접썼어

고올든소르쟈76님의 댓글
고올든소르쟈76 작성일그냥 거대한 연극을 보는거같앗지 별로였음차라리 신화적 괴물이나 현상을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것으로 비유해서 했으면 그게더 재밋엇을꺼같음

LaNoir님의 댓글
LaNoir 작성일사실 키클롭스의 희극적 연출키르케, 칼립소와 성적인 교감 같은걸 어떻게 표현했을까 궁금했는데말그대로 거대한 연극처럼 표현해놨더라.신화 자체가 그렇지 뭐.. 하는 마음이 반 / 아쉬움이 반인 것 같아그래도 본문에 썼듯, 확실히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은 있다고 봄.정말 신들에 의한 파멸이었는가, 인간의 선택에 의한 파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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